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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따우알빠 유빵끼

라틴아메리카의 음악과 문화

라틴 음악 중에서도 한국 사람들에게 비교적 친숙하고 많은 사랑을 받는 음악이 멕시코 음악이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코코’를 통해서 더욱 사람들에게 가깝게 다가왔다. 문학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어서 라틴 아메리카의 현대 문학은 우리나라에서 많은 인기를 얻었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과 이사벨 아옌데의 ‘영혼의 집’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알려진 라틴 예술이건만 라틴 음악의 아버지라 할 아따우알빠 유빵끼에 대해서는 극단적으로 그 지명도가 떨어지고 만다. 라틴 아메리카 인들은 아따우알빠 유빵끼야말로 라틴  음악 그 자체이며 다른 음악가들은 그 앞에 나오면 빛을 잃는다고까지 말할 정도이다. 아따우알빠 유빵끼는 누구이며, 어째서 그처럼 큰 존재인 것일까?

아따우알빠 유빵끼(Atahualpa Yupanqui)

라틴아메리카의 대표적인 가수 아따우알빠 유빵끼, 그의 노래 중에는 ‘트리오 로스 빤초스’나 ‘로스 뜨레스 디아만떼스’의‘아름다운 하늘(Cielito Lindo)’이나 ‘어떤 사랑의 이야기(Historia de un amor)’, ‘꾸꾸루 꾸꾸 팔로마’등 정말 감미롭고 아름다운 선율의 곡들이 많다. 아따우알빠 유빵끼라고 하는 이름은 그의 원래 이름이 아니다. 유빵끼라는 이름은 꽁끼스따도르에 맞서 투쟁했던 잉카의 마지막 황제를 찬양하는 뜻에서 따온 것으로 께추아어로 ‘멀리에서 와서 노래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본명은 엑또르 로베르또 차베로(Hector Roberto Chavero)이다. 그의 아버지는 인디오 혈통이었다. 그는 청년시절 시를 쓰는 것을 좋아했으며 시를 발표할 때부터 이미 아따우알빠 유빵끼라고 서명했다고 한다. 그는 시를 통해서 자기 시대의 역사의 일부분으로서 인디오들과 라틴 아메리카의 인간과 역사를 전해주었다. 

생애

유빵끼는 1908년 1월 30일,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 주 페르가미노의 한적한 시골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곳의 역장이었다. 유빵끼가 자란 곳은 탱고의 명곡 ‘아디오스 팜파 미아(Adios pampa mia)’로 알려진 팜파라고 불리는 광대한 초원지대이다. 거기서 사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인생의 태반을 말 잔등에서 보낸다’는 가우초(인디오의 피가 섞인 팜파 특유의 목동)들 뿐이었다. 그곳에서 들을 수 있는 음악은 가난하고 외로운 가우초 들이 기타를 손에 들고 잔잔하게 읊조리는 즉흥시나 감상적인 비달리따(Vidalita:인생 혹은 생명의 노래로 불리는 서정가)였다. 유빵끼의 집에는 낡은 기타가 하나 있었는데, 어린 아들이 기타에 흥미를 갖게 되자 아버지는 이리저리 수소문한 끝에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선생을 찾아내서 아들이 클래식 기타 레슨을 받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아르헨티나는 에스파냐로부터 전래된 전통을 착실하게 지켜서 기타 음악이 발전된 나라이며 그 수준도 상당히 높았다. 유빵끼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은 기타를 통해서 표현하는 음악에 대한 사랑과 말없이 주위의 모든 것을 놓치지 않고 관찰하는 사색가의 눈이었다. 유빵끼가 9세가 되었을 때 아버지는 아르헨티나 서북부의 아름다운 도시 투쿠만으로 전근되었다. 투쿠만은 푸름이 짙은 계곡이 있고 역사가 오랜 작은 마을들이 자리 잡고 있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따라서 투쿠만에는 원주민 인디오와 에스파냐인들의 혼혈인 메스띠소가 태반을 차지하여 토속 신앙이 혼합된 기묘한 가톨릭 의식이나 민속 색채가 풍부한 민요와 춤을 볼 수 있어서 부에노스 아이레스나 팜파 지역과는 이질적인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는 곳이었다. 특히 투쿠만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탕수수 산지로 수확기에는 각지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품을 팔러 오곤 했다. 그때마다 국경을 넘어서 온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고장의 폴끌로레를 가지고 왔다. 그들의 다양한 노래는 젊은 유빵끼에게 충분한 음악적 자양분이 되었다. 청소년으로서 유빵끼가 원하는 바를 택해야 할 때가 왔을 때, 그는 하고 싶었던 의학을 공부하기에는 너무 가난했기에 기타를 연주하면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유빵끼는 14세때 최초의 시를 썼는데, 거기에 아따우알빠라고 서명을 했다.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 버리는 바람에 유빵끼는 10대 때부터 혼자 힘으로 살기 시작했다. 그는 사탕수수밭에서 품을 팔기도 했고 가우초 노릇을 하기도 했다. 힘든 석공일도, 직은 지방 신문사의 기자로도 있어 봤고 때로는 이름 없는 떠돌이 기타리스트, 음유시인이기도 했다. 

음악의 여정

그러던 어느 날부터 유빵끼는 방랑자로서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길’이라는 영화에 나오는 곡예사 잠파노처럼 작은 트럭을 몰고 마을로 들어가서 우선 그가 자신 있게 연주할 수 있는 클래식 기타 곡을 몇 곡 들려준 다음 귀에 익은 민요를 조금 섞어서 동네 사람들의 비위를 맞췄다. 작은 음악회가 끝나면 준비한 흰 막을 펼친 뒤 털털거리는 영사기로 영화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유빵끼는 라틴 아메리카의 구석구석을 방랑했다, 북부의 안데스 산맥에서는 인디오의 폴끌로레를 들었고 께나와 차랑고를 배웠다. 만나는 사람들로부터, 그들의 노래들로부터 삶과 죽음의 의미를 그리고 현실 너머에 또 사람들의 내밀한 방식 너머에 놓여 있는 것들을 보는 법을 배운 것이다. 그러다가 19세 때 처음으로 본격적인 노래 ‘인디오의 오솔길(Caminito del Indio)’를 작곡하고, 비로소 수도로 진출하게 되었다. 그렇게 인디오들의 각 지역을 돌아다니며 함께 호흡하고 노래한 유빵끼에게 사회의 부조리를 노래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권력으로부터의 위험을 무릅쓰고 또 다른 지평 위에 시선을 두기로 결심한 라틴 아메리카의 다른 예술가들과 마찬가지고 유빵끼도 갖가지 유혹, 실망, 무관심에 대항하면서 자주 구속됐다. 옆 나라 우루과이로 도망가기도 했고 1950년 전후에는 망명에 가까운 모습으로 파리로 가야 했다. 그러나 그러한 그의 삶이 결국은 그를 더욱 유명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유빵끼는 파리에서 거의 20년 동안 살았고 거기서도 계속 시와 곡을 써 왔다. 고통스럽게 시작된 유빵끼의 삶은 결국은 영광으로 끝났다. 모두 합쳐 약 1500편에 이르는 시와 노래를 통해 라틴 아메리카에서 그의 이름은 전설이 되었고 이 대륙의 전통에서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 된 것이다. 유빵끼는 1992년 5월 23일 강연 때문에 방문했던 남프랑스 니스의 한 호텔에서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다. 그의 나이 84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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