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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의 누에바 깐시온
보통 칠레와 같은 제3세계 국가에 있어서 문화의 위기는 빈부의 격차, 민족주의와 외세, 전통과 현대성, 시골과 도시라는 대립이나 이분법에서 생겨나는 갈등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비해 칠레의 누에바 깐시온 운동은 그 발생 토기부터 그 나라의 사회적 딜레마와 관련되어 있었다. 인구가 1540만 인 칠레는 천연자원이 풍부한 나라로 임산 자원, 수산 자원도 풍부하지만 무엇보다도 광물의 매장량이 풍부해서 세계 구리 매장량의 약 25%를 차지하고 있고, 금과 은의 매장량 또한 매우 많다. 그러나 칠레의 지하자원의 부는 주로 미국과 영국 등 외국의 대기업의 수중에 들어가 있었고 뿌리 깊은 귀족 계급이 전체 경작지의 5분의 4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대다수 칠레인들은 그들의 조국이 가진 가장 가치 있는 자원으로부터 아무런 이익도 얻을 수 없었다. 토지 없는 농민들은 대규모 농장에서 일하는 것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도시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들은 만성적인 도시 실업 인구의 일부분이 될 뿐이었다. 어떤 방식으로든 칠레의 현대 예술이 이런 실제적인 문제와 대면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누에바 깐시온 운동은 처음부터 민중의 삶에 동참하면서 점점 넓은 촉의 청중에게 그 영향을 뻗어 갔으며 1970년대 초에 가장 활발했다. 역대 정권의 개혁을 위한 진지한 시도가 칠레 빈민들의 생활 조건을 향상시키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자 수백만의 가난한 국민들 사이에서는 진보에 대한 기대가 일어났다. 그러한 기대가 1970년 11월, 세계 최초로 자유선거로 인민통일연합의 후보인 마르크스주의자 대통령인 아옌데를 탄생시켰다. 당시 62세의 살바도르 아옌데는 교육받은 의사로서 칠레 사회당의 창립자였고 상원의원, 보건장관을 역임한 마르크스주의자였다. 아옌데는 민중의 입장에 서 있는 누에바 깐시온 운동은 지지했고 칠레의 노래 운동은 국가적인 지원을 받으며 국가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그 운동의 중심에 빅토르 하라가 있었다.
빅토르 하라
빅토르 하라는 1932년 9월 28일, 칠레 남부의 가난한 시골에서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고 10살 때인 1948년 가족은 수도 산티아고로 이주했다. 하라의 아버니 마누엘은 소작농이었고 어머니 아만다는 미뿌체족의 혈통을 이어받은 여성이었다. 그의 가족이 정착한 곳은 산티아고의 변두리 론껜의 빈민 지구 뽀블라시오 노갈레스라는 곳이었다. 론껜은 대지주 루이스 카글레 일가의 소유지로 그곳의 주민은 대부분 카글레 일가의 소작농이었다. 그 무렵 산티아고 빈민가의 영아 및 유아 사망률은 서반구에서 가장 높았는데, 노동이 워낙 힘들기도 했고, 1880년대 이래로 칠레가 앓아온 고질적인 인플레에 의해 쥐꼬리만 한 월급이 잠식되어 버리는 것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정부의 어떤 정책도 빈민들의 생활 조건을 향상하는데 도움이 되지 못했다. 하라의 소년시절은 보통의 사람들이 겪는 젊은 시절은 아니었다. 그는 가난한 소작농 부부 사이에서 태어났고, 아버지 마누엘의 고약한 술주정과 폭력, 산티아고 중앙역 부근 빈민가로의 이사, 가족을 부양하기 위한 어머니의 눈물겨운 노력과 죽음........ 이런 경험들은 하라의 가슴에 평생토록 남았다. 군복무를 마친 하라는 1956년 연출가 노이스반데르가 조직한 팬터마임 극단에 입단했고, 그해 3월 한 동료 단원의 권유로 당시 칠레의 유일한 연극 아카데미였던 칠레대학 부설 연극 아카데미에 입학, 연출과 연기공부에 몰두했다. 훗날 하라의 부인으로서 동지로서 든든한 역할을 해주었던 조안 터너도 이 연극 아카데미에서 무용을 강의하고 있었다. 하라는 재학 중이던 1957년 산티아고 시내에 있는 카페 상파울루에서 비올레따 빠라를 처음 만났다. 그는 그녀의 자녀들과도 친교를 맺고 칠레 민속음악의 발굴과 재현에 일익을 담당하면서 가난하고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 행활, 그들의 기쁨과 슬픔, 희망, 눈물과 축제 및 경우에 따라서는 감옥이나 추방에서 겪는 고통을 노래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자유의 순교자
하라는 1965년에는 드라마 “라 마냐”(남을 속이는 수단)의 연출로 칠레 연극 비평가상을 수상하면서 유명해졌다. 1966년에 첫 솔로집 Victor Jara를 발표하고 1968년에는 낄라빠윤과 함께 만든 “아메리카 대륙 민요집”으로 비평가 상을 수상하면서 차차 가수로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969년 산티아고 가톨릭대학의 커뮤니케이션 센터가 주최하는 제1회 ‘칠레 누에바 깐씨온 페스티벌’이 열렸는데 하라는 이 대회에서 대표곡이라고 할 수 있는 “농부의 기도”라는 곡으로 우승을 차지하면서 온 라틴 아메리카에 그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하라는 1971년 11월 멕시코, 코스타리카,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페루, 아르헨티나 등을 순회하는 장기 연주 여행을 통해 조국 칠레가 처한 현실과 아옌데 정부의 정책을 홍보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그러나 그런 순간도 잠시, 마침내 쿠데타가 일어나고 만다. 1973년 9월 11일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이끄는 칠레군부의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칠레의 민주사회주의 실험과 누에바 깐시온 운동은 종말을 맞게 되었다. 아옌데 대통령은 군인들에 의해 살해되었고, 그날 하라는 국립공과대학에서 열리는 미술전의 오프닝에서 노래하기 위해 산티아고의 대학으로 가고 있었다. 이 날의 전시회 개막식에서는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이 연설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라디오 뉴스를 통해 쿠데타 소식을 들었지만 하라는 피신하는 대신 대학으로 가서 이미 캠퍼스를 포위하고 있던 군인들에 의해 체포되었다. 다음날, 하라는 구금되었고, 목격자들의 얘기에 따르면 하라는 구금된 동안에도 열심히 인민연합 찬가인 Venceremos를 불렀다고 한다. 군인들이 노래를 멈추지 않는 하라의 기타를 빼앗자 하라는 대신 손 박자로 계속 노래를 불렀고 화가 난 군인들은 총검으로 그의 양손을 짓이겼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자 그를 향해 총을 난사했다. 치열한 경쟁과 소비주의 세상에서 정직하고 순수한 가치관을 갖고 있었던 그는 오늘날 라틴아메리카에서 체 게바라와 함께 영웅이 되어 남아있다.